[고전톡톡 다시 읽기](36)
박지원 ‘열하일기’
‘여행’ 낯선 경계를 넘고 나를 넘는 길
“자네, 길(道)을 아는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이것과 저것, 그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만 볼 수 있는 법.”
▲ 연암 박지원
●울음,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기쁨의 노래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압록강을 앞두고 연암은 두려움과 설렘에 잠시 머뭇거린다. 책문을 통과하기 전에는 동쪽을 바라보며 집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러다 마주친 드넓은 요동 벌판! 연암은 이곳에서, 아기가 태어날 때 힘차게 울 듯 자신도 한번 시원하게 울어보고 싶다고 한다. 그것은 두려움과 슬픔의 울음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기쁨의 울음이요, 해방감의 통곡이었다.
연암은 당시 사대부들이 의례적으로 가던 길을 가지 않았다. 과거를 보고 관리가 되는 길 대신 친구들과 고금의 일을 토론하고 글을 썼다. 물론, 주어진 길을 거부하는 삶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뜻하지 않은 비방을 당하기도 했으니 때론 고독하고 때론 우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 연암의 눈을 아찔하게 만든 열하의 황금 궁전.
초록이니 다홍이니 색색 빛깔 기와는 더러 보았으나 지붕 위에 금 기와를 올린 건 처음이다.
▲ 건륭제의 만수절(70세)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 사행단.
연암은 열하로 모여든 만국의 진공 행렬들 사이에서 ‘문자로써는 형용할 수도 없는’ 온갖 사물들을 만난다.
‘내 평생에 괴이한 구경은 열하에 있을 때만 한 것이 없었다.’
그러던 차, 우연히 삼종 형님을 따라가게 된 중국행.
좁은 조선을 벗어나 광활한 땅을 마주한 연암은 거기서 인간 존재의 미미함과 수많은 길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연암에게 여행은 단순히 견문을 넓히고 타지 풍경을 감상하는 ‘유람’이 아니라 천지 만물과 마주쳐 기존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길 위의 실험’이요 ‘구도의 길’이었다.
●도, 경전이 아니라 똥 덩어리에 있다
“소의 몸뚱이에 나귀 꼬리, 낙타의 무릎에 호랑이 발, 귀는 구름을 드리운 듯하고 눈은 초승달 같고, 어금니는 두 아름이나 되고 키는 한 장(丈) 남짓이며 코는 자벌레처럼 생겼다.”
연암은 생전 처음 본 코끼리를 묘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기존에 알고 있던 그 어떤 동물로도 코끼리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었다. 코끼리 하나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앎이라니!
이 ‘낯선 사물’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던 연암은 불현듯 어떤 이치를 깨닫는다. 코끼리는 맹수인 호랑이를 코로 때려 잡지만 하찮은 쥐 한 마리 앞에서는 쩔쩔 맨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강한가, 쥐가 강한가?
사물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전복시키는 코끼리 앞에서 연암은 ‘만물에 동일한 이치가 있을까?’하는 질문을 던진다.
나의 ‘이치’로 눈 앞에 보이는 코끼리 하나 설명할 수 없는데, 어찌 내가 아는 이치를 천하에 두루 통하는 이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천하의 이치라고 하는 것도 결국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의 이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것은 대단히 불온한 의심이었다. 일부종사해야 하는 도리가 있고, 글쓰기의 전범이 있고, 경전 해석에 정통이 있는 조선에서, 그와 같은 ‘당연한 이치’를 의심하는 것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부정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연암의 사유에 틈을 내는 것들은 코끼리처럼 진기한 동물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림처럼 곱게 쌓아 올린 두엄더미’에서도 천하의 제도가 다 갖춰져 있음을 본다.
오랑캐가 다스려도 그들의 삶은 조선보다 훨씬 세련되고 정갈하다. 백성을 다스릴 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중화의 덕과 성인의 도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도탑게 하는 것이다. 이치는 어디에 있으며, 천하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 연암은 말한다. 경전이 아니라 현실에, 저 똥덩어리에 있노라고!
●벗, 나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나
연암은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이 아내를 잃은 슬픔보다 더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벗을 귀하게 여겼다. 함께 음악을 즐기고, 술을 마시고 토론하며 생각을 나누는 친구는 또 다른 나였다.
중국에 가서도 이런 벗을 사귀어 보리라 다짐한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필담을 시도한다. 그러던 중 심양의 ‘예속재’라는 골동품 가게에서 젊은 장사치들을 만난다. 장사란 하찮은 이문이나 쫓아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연암에게 그들은 상업의 이로움을 역설한다.
그런가 하면 열하의 태학에서 만난 중국 선비들과는 우주론에서 윤회론까지 장장 열 네 시간에 걸쳐 필담을 하는데, 여기서 연암은 한족 출신과 만주족 출신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감지한다. 한족과 이민족을 어르고 달래며 통치하는 청나라는 조선이 ‘되놈의 나라’라고 무시할 만한 ‘야만족’이 아니었다.
중원을 차지한 오랑캐들과 싸우려고 해도 그들을 알아야 가능한 것이고, 적수가 안 되니 함께 살 길을 모색하려 해도 우선 그들을 알아야 했다. 연암은 타국의 벗들과 대화하면서 조선에서 외치는 ‘북벌론’이 지식인의 허구적 수사학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나는 나 스스로를 볼 수 없다. 나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건 나의 벗이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타국의 지식인들에게 배움을 구하고, 낯선 사물들 앞에서 자신의 사유를 되묻는 연암.
그에게는 세계가 배움의 터전이요, 세상의 모든 것이 벗이었던 셈이다.
여행을 ‘휴식’하고 ‘쇼핑’하고 ‘관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연암의 여행은 피곤하기 짝이 없다. 그는 끊임없이 걷고, 만나고, 묻고, 웃고, 생각한다. 연암에게 여행은 이것과 저것 사이로 길을 만드는 사유의 실험이자 ‘미지와의 조우’를 통한 깨달음의 여정이다.
‘열하일기’는 지리적 경계뿐 아니라 사유의 경계를 넘어서는 한 구도자의 ‘환희기’다.
문체반정의 배후로 지목된 열하일기
정조 “고문체 쓰면 음직 줄 것”
연암 “이제와 바른글은 무슨…”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정조는 당시 사대부들의 문풍을 어지럽힌 ‘배후’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지목하고, 연암에게 순정한 고문(古文)체로 글을 지어 올리면 음직을 내리겠다고 회유한다. 그러나 졸지에 어떻게 순수하고 바른 글을 짓겠느냐며, 그것이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라는 핑계(?)를 둘러대면서 연암은 끝내 어떤 반성도, 전향도 거부한다.
연암에게 글이란 남을 아프게도 하고 가렵게도 할 수 있는, 한마디로 ‘살아있는 것’이어야 했다.
‘열하일기’는 비장에게 들은 이야기, 하인들과 나눈 대화, 중국 선비들과의 필담 등 온갖 ‘잡다하고 품격 없는’ 글들로 가득하다. ‘허생전’이나 ‘호질’처럼 ‘빵빵 터지는’ 스토리들이 있는가 하면, ‘호곡장’이나 ‘일야구도하기’처럼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주는 철학적 아포리즘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영민한 정조가 몰랐을 리 없다. 연암의 문체에 함축된 사유의 반시대성을!
‘열하일기’는 정조의 시대뿐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다양한 사유를 촉발하는, 대단히 위험하고 강렬한 책이다.
홍숙연
...
열하일기의 인문정신, 허생이 그립다 / 정민 교수
45세의 자제군관
1780년 연암 박지원은 3종형 박명원의 사신 길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따라 나섰다. 말이 좋아 자제군관이지, 실은 아무 맡은 역할 없이 그저 구경꾼으로 따라나선 셈이었다. 이때 그는 45세였다.
좀더 젊었더라면 해외 연수의 좋은 기회였다고나 하겠는데, 그렇게 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 고생스런 길을 그는 왜 굳이 따라 나섰을까?
그의 연행은 친구 홍대용 보다 15년이 늦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박제가나 이덕무도 이미 다녀온 터였다.
압록강을 건넌 것이 1780년 6월 24일이었다. 7월 한 달을 요동벌의 뙤약볕과 소나기 아래 다 보내고 8월 1일에야 북경에 도착했다. 45세의 장년이 일없이 따라나설만큼 한갓진 여행이 아니었다. 수백 명의 인원이 열을 지어 가면 앞의 먼지를 뒤에서 뒤집어 썼다. 매일 목욕을 할 수 있는가,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가 있는가? 모르긴 해도 북경에 도달할 즈음해서 일행은 거의 거지 떼의 몰골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북경에서 겨우 숨을 돌릴만 하자 황명으로 열하의 피서산장까지 걸음을 서둘러야했다. 자칫 열하에서 바로 조선으로 귀로를 잡게 된다면, 꿈에 그렸던 천하 문명의 중심인 북경 구경은 애시당초 물 건너갈 판이었다. 이 돌발 상황 앞에서 연암은 전전긍긍했다. 긴 여독이 채 풀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밤을 새워 길을 걷고, 거센 강물을 하루 밤에 몇 차례씩 건너는 강행군을 거듭했다.
8월 5일 북경을 출발해서 열하에 닿은 것이 8월 9일, 그곳에서 구경하며 머물다가 다시 8월 15일에 출발해서 20일에 북경으로 겨우 돌아왔다.
그런데 예정에 없던 열하 기행이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생기를 주었다. 그전까지 조선 사신 누구도 구경해보지 못한 열하가 그의 섬세한 시선에 포획된 것이다. 그도 그것을 뽐내, 자신의 여행기 제목을 ‘열하일기’라고 붙였다.
도발적 문제 제기
일기는 사뭇 도발적으로 시작된다. 책장을 펴면, 명나라가 망한 지 130여년이 지났는데도 연대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 ‘숭정’ 기원 후 몇 년으로 표시하는 이상한 나라 조선의 관행에 대한 설명과 만난다.
130여년 전에 망한 명나라는 적어도 조선의 연기(年紀)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숨 쉰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연암은 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가는 「도강록」의 첫머리부터 이 이해 못할 연대 표기 방식을 들고 나왔을까?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그는 『열하일기』 「관내정사」의 끝을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구인가? 조선의 박지원이다. 쓴 때는 언제인가? 건륭 45년 8월 초하루다.”로 맺었다. 중국에 갔으니 중국의 지금 연호로 써야 시휘(時諱)에도 걸리지 않고 현실감이 되살아나겠기에 그렇게 썼다. 그러자 이를 본 조선의 사대부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조선의 선비가 명나라에 대한 갸륵한 의리를 잊고, 오랑캐인 청의 연호를 대놓고 썼다고 야단을 쳤다.
오랑캐의 연호를 쓴 원고는 불질러 버리라고 난리가 났다. 그러니까 「도강록」의 서문에서 숭정 연호의 사용 문제를 불쑥 거론한 것은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들에게 연암이 보낸 일갈이었던 셈이다.
『열하일기』는 재미있다. 개구쟁이 도련님 같은 연암의 해학과 풍자가 도처에서 반짝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출몰하는 그의 글쓰기는 역사의 행간을 미끌어지면서 여기저기 덫을 놓고 상징을 묻어 두었다. 하고 싶은 말은 대놓고 하는 법이 없이, 돌려 말하고 비꼬아 말하고 숨겨 말했다. 너무 재미있지만 몹시 어렵다. 이야기꾼의 농탕한 글쓰기는 읽는 이를 매료시키는데, 막상 행간은 5리 안개 속으로 가늠이 쉽지 않다. 그는 말하자면 고도의 전략적 글쓰기를 진행했다.
그것은 ‘다 말하되,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로 압축된다. 할 말을 다 했지만, 드러내놓고 말한 것은 하나도 없다. 책잡힐 구석은 달아날 장치를 다 마련해 놓았다. 그는 끊임없이 말꼬리를 자르고, 결정적인 순간에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리고는 다시 너스레를 떨며 딴청을 한다. 딴청에 낄낄대다 보면 그는 어느새 정색을 하고 날 선 비수를 들이댄다. 정신이 번쩍 들어 자세를 바로잡자 또 딴청으로 넘어간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 지 모를 지경이다.
『열하일기』가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는 찬사까지 받아가며 지금껏 사랑을 받는 까닭도 이 언저리에서 찾아진다. 그저 읽어도 동영상보다 더 생생하게 돌아가는 화면이 눈에 선하다. 심각하게 읽으면 당대의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 인문학이 처한 현실, 이념과 현실의 괴리, 지식인의 역할과 놓인 자리까지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무거운 질문과 그대로 맞통한다. 지금 읽어도 이러하니, 당시에는 얼마나 열광적인 반응이 있었겠는가?
아예 한 편 한 편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가다, 한편이 발표되었다 하면 앞 다퉈 베껴서 열광했을 만큼 『열하일기』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는 도처에서 청의 앞선 문물을 배워와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이용후생의 주장을 반복했다.
촌놈이 서울 구경 와서 보는 것마다 감탄하는 모양으로, 벽돌집에 놀라고, 도로에 놀라고, 심지어는 말똥을 거름으로 쓰는 것에 감동하기까지 했다.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너무 오버 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이 이용후생의 코드만으로 『열하일기』를 규정한다면 뭔가 허전하다. 그것은 그것대로 중요해도 전부는 아니다. 연암의 글쓰기는 끊임없이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목청을 내세워서 배우자고 주장한 이용후생의 강조는 오히려 자신의 핵심 주장에서 의도적으로 시선을 돌려 놓기 위한 물타기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렇다면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뭘까?
오랑캐 연호를 쓴 불온한 글이라는 비방을 입어가면서까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핵심은 무언가?
문체의 불온성은 문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사유의 불온성과 관련이 있다. 문체는 그 불온성을 발화의 영역으로 끌어내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연암은 왜 불온한가?
볼 것을 못 보면 못 볼 것을 본다. 연암의 불온성은 볼 것과 못 볼 것의 전도된 배치에서 비롯된다.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찌들어 대명의리를 훈장처럼 붙들고 있던 조선 지식인들이 ‘볼 것’이라고 생각한 과거 중화의 문물들이 연암에게는 ‘못 볼 것’이 된다. 저들이 ‘못 볼 것’이라고 여기는 청의 발달한 문물과 제도 위에 그는 집요하게 눈길을 준다. 보는 것이 다른 것은 생각이 달라서다. 생각이 다르니 보는 눈도 달라진다.
그는 일기에서 자꾸 ‘못 볼 것’만 들춰내고 ‘볼 것’을 무시하는 발언을 해댔다. 속이 후련하다고 환호한 열혈독자도 있었고, 저걸 가만 두면 큰 문제가 될테니 미연에 싹을 뽑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한 축들도 있었다.
결국 후자의 힘이 더 세서 지금 읽어도 너무너무 재미있는 『열하일기』는 일제시대까지 금서의 그늘에 묻혀 있어야했다.
그런데 그가 애써 들여다 본 그 지점은 지금도 여전히 외면 당한다. 그가 외치는 절규는 소음 속에 파묻히고 넉살 좋은 해학과 풍자만이 그의 본질인양 회자된다. 정말 그런가?
우리가 오늘에 『열하일기』에서 정작 읽어야 할 것은 웃음 속에 언뜻언뜻 숨긴 비수 같은 슬픔이다. 그가 전략적으로 은폐해 둔 너스레와 딴청을 좀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턱도 없는 낙관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일을 늘 그르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저기나 여기나 다를 바 없다. 이미 분명하게 말해주었는데도 못 알아 듣는다면 글쓴이의 문제가 아니라 읽는 이가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열하일기』는 아직도 제대로 읽힌 텍스트가 아니다. 더 꼼꼼히 읽고, 찬찬히 살펴야 할 처녀지이다.
현실은 이렇다.
명나라는 이미 130년 전에 망했다. 명나라는 조선을 도와주려다가 망했다. 그러니 우리는 명에 대해 갚지 않으면 안 될 부채가 있다. 그것은 청을 깨부수어 명나라를 다시 회복하는데서 궁극적으로 성취된다.
북벌은 이 당위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다. 우리는 현재 유일하게 중화의 가치를 붙들고 있는 소중화(小中華)다. 얼마나 당당하고 멋진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북벌의 당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북벌은 국시(國是)요 신성불가침의 국가보안법이었다.
그런데 막상 쳐부숴야 할 오랑캐의 나라에 가보니 그게 아니더라는 얘기다. 북벌은 우리 깜냥에 턱도 없는 얘기더라는 것이다. 북벌의 기개가 비록 장해도, 직접 가서 보니 도대체 될 법한 소리가 아니더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어찌 할까? 북벌의 이데올로기를 내던지자고 하면 반동으로 몰려 매장 당하겠고, 북벌의 대열에 합류하자니 한 차례의 여행으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 속에서 결국 연암은 머리를 감추고 꼬리를 자르는 오리무중의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본론을 감추는 글쓰기는 치사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 점을 잘 이해하고 나면, 『열하일기』의 글쓰기가 얼마나 스릴 넘치는 줄타기인 줄을 알게 된다. 그 다음부터 독서는 탐정놀이가 되고, 꾀 겨루기가 된다. 이 긴장을 당대의 독자들도 충분히 즐겼기 때문에 『열하일기』를 두고 그 소동이 벌어졌다.
공연히 일기를 쓰다가 말고, 「허생전」이나 「호질」같은 장황한 서사가 끼어든다. 날씨가 어떻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몇 리라고 쓰는 중간에 정색을 하고 묵직한 논설문을 배치한다. 아니면 「관내정사」에서 꽤나 심각한 분석을 하다 말고, “장복이를 돌아보니 귀밑털 아래 돋은 사마귀가 요즘은 좀더 커졌다”고 너스레를 떨어 초점을 흔들어 놓는 대목 같은 것을 보면, 이 노인의 글 재간에 미상불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콘텍스트 없이 텍스트만 가지고 「허생전」을 읽고 「호질」을 보면, 번번이 발목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소설 연구자들이 수십 편씩 논문을 써대도, 두 작품은 저만치 떨어져서 ‘그건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연암의 글쓰기 전략에 지금의 독자까지 농락을 당하는 형국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단골로 실리는 「일야구도하기」 같은 글은 단순한 견문기를 넘어 인식론의 본질을 깊숙이 건드린다. 코끼리를 처음 본 충격을 글로 쓴 「상기」는 움베르또 에코가 울고 갈만큼 기호학의 본질을 묘파했다. 요동벌을 보고 한바탕 울만한 곳이라고 넉살을 떠는 장면, 똥거름이야 말로 중국에 와서 본 가장 큰 장관이라고 장담하는 대목은 그것대로 소국에서 좁은 식견에 답답하던 자아가 마침내 각질을 걷고 큰 세계와 호흡하는 자유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열하일기』의 스펙트럼은 이렇듯 넓고 깊다.
허생이 그립다
당시 조선에서 자신을 옥죄던 질곡에 답답해하던 연암이나, 실용의 만능 속에 인문이 말살되고 인문정신이 발 디딜 곳 없게 된 오늘의 우리나 어쩌면 처지가 똑 같다. 중국 체험을 통해 막혔던 숨통을 틔우고, 나갈 방향을 찾고자 했던 연암의 답답증과 조급증은 지금도 이름만 조금 바꾼 채 우리 앞을 막아선다.
도대체 인간은 발전할 줄 모르는 존재다. 변화를 당위를 외치면서도 변화를 거부한다. 실용의 잣대 아래 저질러지는 만행들은 오늘도 인문학을 질식시킨다. 그저 내버려두기만 해도 좋겠는데, 따라오지 않는다고 윽박지르고, 바꾸지 않는다고 파렴치범으로 몰아세운다. 멋지고 폼나게 북벌하자는데 왜 말을 안 듣느냐고 닦아 세운다. 왜 쓸데없이 유언비어를 유포해서 적전분열을 조장하느냐고 경고를 보낸다.
허생은 마누라 바가지를 못 견뎌 7년 독서를 중도에 작파했다. 그 7년 독서만으로도 몇 년 만에 백만 냥을 번 거부가 되었다. 그리고는 그 돈의 대부분을 쓸데 없다며 바다 속에 쓸어 넣었다. 막상 부자로 살자면 살수도 있었지만, 그는 끝내 딸깍발이 독서인으로 돌아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말로만 하는 북벌은 굳이 이완 대장이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가 있다. 막상 북벌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제시한 허생의 세 가지 대안에 이완은 싸늘히 고개를 저었다. 허생이 분노해서 그를 칼로 찌르려다, 끝내 절망하고 종적을 감춘 까닭이다.
지금도 인사고과를 들먹이고 실용을 내세우며, 연구비를 앞세워 이거 줄테니 말 잘 들으라고 북벌을 외치는 이완 대장은 도처에 있다. 구체적으로 어찌 하겠다는 실행계획은 그에게 없다.
그들은 북벌을 위한 정보 수집을 위해 왕자들의 머리를 황비홍처럼 깎게 할 용의도 없고, 중국과 통상을 허용해서 양국의 물자가 소통되도록 할 의향도 없다. 하라는 대로 말 잘 듣게 하고, 문제가 생기면 제 탓이 아니라 세상 탓으로 돌리면 된다. 거기에 지식인들은 부화뇌동해서 줄서서 오랑캐 연호를 쓰다니 저 놈이 제정신이 있는 놈이냐고 함께 삿대질을 해대며, 줄에서 이탈한 사람을 왕따시킨다.
『열하일기』가 지금껏 힘있는 텍스트인 것은 연암의 그때나 우리의 지금이나 형편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의 예리한 분석은 눈앞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위력적이다.
이것은 체념할 일인가, 아니면 절망해야 할 일인가?
사람은 돈 만으로 사는 동물이 아니다. 갈매기 조나단은 비행 연습을 하면서 동료 갈매기들에게 욕만 먹었다. 하지만 그 갈매기들이 썩은 음식 찌꺼기에 여전히 만족하고 있을 때, 그는 날기 연습의 생각지 않은 부산물로 바다 속 깊은 곳의 싱싱한 물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인문학에 대한 폭력적 구조는 시대를 떠나 반복 답습된다. 사람들은 눈앞의 생존을 늘 위기로 가정하고 확대재생산한다. 썩은 찌꺼기라도 먹지 않으면 굶어죽게 된다고 자꾸 겁을 준다. 이거라도 있을 때 부지런히 먹어두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가?
연암은 한 차례 중국 여행에서 우물 속 개구리의 구태를 활짝 벗어던졌다. 그는 다시 우물 속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여행 전의 그가 아니었다. 엄마 뱃속에서 바깥 세상을 그려보는 것과, 마침내 태를 벗어나 사지를 쭉 뻗어 으앙 하는 울음을 시원스레 터뜨려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연암의 글에 길 가다가 눈을 뜬 장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눈을 뜨자 도리어 제 집을 못 찾아 길에서 울고 섰다. 눈 떠서 좋아한 것도 잠깐, 어디가 어딘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 것이다. 그에게 내려진 처방은 도로 눈을 감으라는 것이다. 길을 잃어 제 집을 못 찾게 되는 것은 눈 뜨는 기쁨보다 더 큰 문제니까, 잠깐 눈을 감고 제 집까지는 찾아가는 것이 급선무다. 그러니 도로 눈을 감으라는 것은 제 집을 찾아갈 때까지만 유효한 처방이다.
집을 잃고 길에서 울고 서있는 장님에게 너는 장님 주제로 사는 것이 분수에 맞다고 말하면 곤란하다. 도로 눈을 감고 일단 제 집을 찾아가면 그 다음부터는 길 잃고 헤맬 염려가 없어진다.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기는 법이 없다.
의미는 외형(外形) 아닌 내태(內態)에서 나온다. 얼마 짜리 옷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입어서 맵시가 나느냐가 더 중요하다. 태깔이 나야 값이 있지, 값만 비싼 것은 소용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슨 상표와 얼마짜리에 더 연연한다.
연암의 『열하일기』에는 돌아오는 노정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다. 그는 북경까지 간 이야기만 적고 오는 길에서 일어난 일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북경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만 같다. 아직 찾아야 할 것이 있고, 가야 할 길이 남아서다.
우리가 걷어내야 할 껍질은 어떤 것인가? 내가 본 장관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허생은 어디 있나?
북곽선생과 동리자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들을 혼쭐 내줄 사나운 범의 서슬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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